라이프로그


이등박문=네이버의 오늘의 세계인물 吐喊傘

쓰레기 네이버. 순국선열을 쏘다.


오늘 아침 습관적으로 네이버를 열었다가 놀라운 화면을 보았다. 네이버가 오늘의 세계인물에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를 피처링한 것이다. 삼일절 지난지 불과 하루도 채 안된 오늘 아침에 이토 히로부미가 세계인물로 올려지다니 네이버의 '오늘의 세계인물' 피처링 기준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다.

피처링을 클릭해서 해당 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토 히로부미 좌측에 '지혜와 지식을 남긴 세계인물과 만나보세요' 라고 되어있는데,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도대체 어떤 지혜와 지식을 남긴 세계인물인지 공식적으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순국선열들을 체포하여 고문하던 기술이 지식과 지혜라는 말인가.

해당 페이지의 내용은 원재훈이라는 소설가가 이토 히로부미의 일생에 대해 '작가 나름의 객관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찬양을 늘어 놓고 있다. 그 글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민족의 원흉이자 원수이기는 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논리와 인간적인 면에서 뛰어났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존경해야 한다는 말인가? 일본에도 세계적인 인물도 있을것이고 그 사람들 중에 올릴 수도 있다. 수많은 일본인 중에 왜 하필 이토 히로부미인가. 순국선열들이 돌아누우실 통탄할 일이다.

네이버가 정치적으로 어떤 노선을 걷던지 그들의 생존에 관련된 사항이라 그 부분에 대해 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삼일절 다음날 이토 히로부미를 세계인물에 올린 것에 대해서. 나는 분노한다. 그리고 이런 쓰레기 같은 기업이 있다는데 선열들께 진정 부끄럽다.

네이버는 공식 사과하라.





아래 글은 네이버에서 퍼온글이다. 임의로 내리기전에 스크랩했다.


안중근의사와 함께 하얼빈 거사를 감행한 우덕순의사는 재판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토는 조선에 와서 5개조 조약(을사늑약)을 만들어 각의에 회부하여 여섯 대신으로 하여금 강제로 동의하게 했다. 특히 외무대신과 같은 자리는 당시의 일본인 고문에게 맡겼다. 이를 국민들이 동의했다고 황제(고종)께 말씀드렸는데, 황제께서는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토는 이를 한국민의 희망에 의해 체결됐다고 일본 천황에게 말하고 세간에 발표했다. 이는 즉 한국과 일본의 황제 폐하를 속이고 또 한국국민을 기만한 것이다. 이토는 한국민의 원수이다. 그 밖에 이토가 대한제국의 통감으로서 하는 일은 모두 한국민들을 분노하게 했기 때문에 모두 이토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이토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반일감정의 원조이다. 그 이미지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이 되어서도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가 대한제국의 통감으로 부임했다는 의미는 이제 한일합방, 즉 일제강점기의 예감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제국에 문화적인 정책을 시행한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국적으로 일어나는 의병활동을 잔혹하게 탄압하고, 애국지사들을 잔인하게 처벌했다.

이토는 일본의 메이지 정부의 최고지도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는 일본 근대의 영웅인 동시에 대한제국의 원흉이었다. 이 극단의 인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인간에게는 객관적인 판단의 선을 넘어서는 주관적인 감정이 있다. 이토는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객관과 주관의 사이에 미묘하게 존재한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미시다 도오루는 이토에 대해서 이런 평가를 했다. “그에게는 다카스기와 같은 천재적인 측면도 없고 인간적인 깊이도 유신 3걸(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없는 현실적인 균형감각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일을 수습하는 재능이 있었다. 이토가 역사에 남긴 실적은 유신 3걸에 뒤지지 않는다.”
 
근대 일본의 교육자 요시다 쇼인은 그의 <송하촌숙>에서 많은 제자들을 길렀는데, 그들은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다카스키 신사쿠는 그의 수제자였다. 요시다는 제자들 중에서 이토에게는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하지만 스승 요시다 쇼인과의 만남은 이토의 68년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된다. 1858년 10월 이토가 나가사키로 출장을 갈 때 요시다 쇼인은 이토에 대한 소개장을 써 주었다. 이토에 대한 스승의 평가가 잘 나타나 있다. “이 서생은 이토 도시스케(메이지 유신 이후 이토 히로부미)라고 하며, 제 아래 있는 사람 중에서 가장 낮은 자입니다. 죄인인 저와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보다 재능이 떨어지며 학문도 미흡합니다. 성격은 좋지만 화려하진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점이 좋습니다.”

요시다는 이토가 ‘주선가’의 기질은 있다고 평가했다. 다른 제자들은 요시다 선생의 제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스승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지만, 이토는 평생 동안 스승에 대해서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승이 자신을 과소평가 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훗날 일본의 최고 정치인이 되어 문득 ‘스승님 저도 이 정도면 …’ 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이 그리 인정하지 않았던 제가 이렇게 살아서 일본 메이지 정부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페리 제독의 검은 함대에게 치욕적으로 개항을 해야만 했던 대 일본제국이 이제는 군대를 이끌고 조선과 청국 러시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스승님, 저도 이 정도면 스승님의 제자 중에서 ‘가장 낮은 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라는 의미로 읽힌다.

이토의 본명은 하야시 도시스케이다. 가난한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가 하기번의 무사 집안인 미즈이(뒤에 이토로 바꿈)가의 양자가 되면서 운 좋게 하급무사의 신분을 얻었다. 그렇지만 당대 대 귀족들의 틈바구니에서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살다가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어 정치가가 된 것은 누구보다 빨리 외국 문명을 흡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젊은 날 이토는 서양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양이’의 편에 서 있었다. 당시는 도쿠가와 막부가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였고, 일본인 대다수는 천황의 존재조차 몰랐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일본인들의 서양에 대한 정서는 이러했다. “일본인들은 일본인들끼리 아무런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 타국에 피해를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왜 무력으로 개국을 강요 하는가. 불법 행위다. 진정 개국을 강요한다면 무사의 체면을 걸고 오랑캐를 물리치겠다.” 당시 일본의 정국은 존왕(尊王, 천왕을 존대한다), 좌막(佐幕, 막부를 지지한다), 양이(洋夷), 개국 (開國)의 네 그룹이 존재했다. 이토가 출생한 조슈번(지금의 야마구치 현 일대)은 존왕양이노선을 취한다. 그들이 존왕의 노선을 취한 것은 양이 때문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면 일본은 서구 열강에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키기 위해 천왕 편에 섰던 이토의 신념이 개국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1863년 그의 평생 친구인 이노우에 가오루와 ‘해군학’ 공부를 위해 영국에 다녀온 후부터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일본의 총명한 젊은이들을 지원한 스후 마사노스케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그는 조슈번의 재력가로서 고향의 젊은이들을 외국으로 내 보내는데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그가 서양으로 젊은이들을 보내면서 한 말이 있다. “이번에 우리 번(조슈번)에서 무기를 하나 구입하려 한다. 그 무기란 사람이다. 일단은 양이를 통해 일본의 무를 서양인에게 보이겠지만, 곧 각국과 교류할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서양의 사정을 알지 못하면 크게 불리해진다. 그 때 활용할 무기로 두 사람을 영국에 보내 공부하게 하고 싶다.”
이전에도 이토는 서양에 늘 가고 싶어 했다. 그것만이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대성할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후의 후원으로 이토와 이노우에는 상하이에서 출발하는 페가수스 호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약 4개월에 걸친 고통스러운 항해였다. 정식으로 운임을 내고 승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들은 이들에게 항해술을 가르쳐 준다는 명목으로 두 사람을 밑바닥부터 교육시켰다. 이토는 과로에 음식까지 맞지 않아 매우 심한 설사에 시달렸다. 그 선박에는 수부용 화장실이 없었다. 바다로 나와 있는 횡목에 매달려 목숨을 걸며 용변을 봐야만 했다. 이토는 하루에도 몇 번씩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위 횡목에 매달려 목숨을 걸고 용변을 보면서 ‘이제 나는 글렀다’고 울부짖었다. 이노우에는 ‘이 따위 일로 약한 소리를 하다니, 평소 자네답지 않다’고 격려했다. 이토의 몸에 줄을 감아 그 한쪽 끝을 기둥에 감고, 자신도 거친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용변을 보는 이토가 바다로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줬다. 이노우에 덕분에 이토는 살았다. 훗날 두 사람은 매우 ‘친밀한 동지’로 메이지 정부의 핵심인물이 된다. 이러한 이토의 모습은 당시 개국을 강요 받던 동아시아의 모습과 같이 그려진다. 높은 파도가 휘몰아치는 거친 바다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운명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죽을 고생을 다해 미국이나 영국으로 공부하러 간 이토는 일본이 강제로 개국을 당하고, 불평등조약을 맺은 그 경험을 되살려 조선 침략을 비롯한 일본 제국주의의 선두에 서게 된다.

이후 이토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열강과 조슈번 사이에 시모노세키전쟁이 일어나자, 전후 평화 교섭 과정에 통역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영어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 되었다.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외교적인 업무를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이토는 이전에 미국에 갔을 때 오쿠보와 더불어 이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1864년 조슈번과 도쿠가와 막부 사이에 벌어진 막장전쟁(幕長戦争)에서 보수파들이 막부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이자, 다카스키 신사쿠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토의 이름이 서서히 일본 정치계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도시스케에서 ‘히로부미’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어에 능통한 이토는 신정부에 참여해 외국사무국 판사, 효고 현 지사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870년에는 화폐와 은행 제도 조사를 위하여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1871~73년에도 해외를 시찰하였다. 이토는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던 해인 1879년에 헌법 연구를 위해 유럽으로 떠났다. 안중근 의사의 탄생과 이토의 일본 헌법 연구는 참으로 절묘한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그는 1887년 6월부터 가나가와 현 나쓰시마 별장에서 헌법 초안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여러 차례 회의와 수정을 거쳐 1889년 2월 1일 7장 76조의 일본헌법이 반포되었다.

1878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되자 내무성의 내무경이 된 이토는 그와 대립하던 오쿠마 시게노부를 몰아내고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1885년 일본에 내각제도가 창설되자,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고, 1888년에는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사전 이토 히로부미>에서 저자인 미요시 도로우는 이토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된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12월 22일 관제개혁이 포고되면서 내각제도가 발족되었다. 태정관 제도는 시행 18년 만에 막을 내렸다.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태정대신에서 내각총리대신으로 바뀌었을 뿐 형식상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부터는 가문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총리대신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옛 번 시절 무사 중 최하위급인 이시가루보다 미천한 신분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마침내 천황과 가장 가까운 중책을 차지하게 된다. 과거 역사에서 이토에 필적하는 유일한 인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도다.” 그리고 이토는 헌법이 반포된 다음해인 1890년 의회가 수립되자 귀족원의장이 되었으며 1892~1896년과 1898년, 1900~1901년에도 각각 5대, 7대, 10대 내각총리대신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대한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이 된다. 그는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11월 4일에 치러졌다.

이토는 1909년 7월 1일 오이소에 있는 자택을 떠나 시모노세키에서 군함 만주 호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6월 14일 대한제국 통감 직을 사임한 이토가 후임자에게 직무 인수인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토는 떠나는 배 안에서 수행원들에게 개국 당시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고 토로했다. 이후의 생은 이토의 죽음으로의 여행이었다. 그는 중국으로 가기 전 아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들을 남겼다. “온 몸을 다해 죽음을 손에 쥐고 행동하라”는 말과 함께 외국 유학을 떠날 예정인 아들에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말을 이었다.

“읽는 학문도 필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책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책이어야 한다. 서양에 도착하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그 누구와 만나 그 어떤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에는 반드시 겉과 속이 있다. 넓고 깊게 사물의 안과 밖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정밀한 관찰은 서양인의 특색이며, 조잡한 관찰은 동양인의 약점이다. 사물에는 이뤄지는 순서가 있다. 돌발적이거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식적이고 주도 면밀한 운용이 중요하다. 천하의 일을 추진하노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나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너도 네 뜻을 이루려면 죽음을 각오하라. 의존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자력으로 해라."

그는 아들에게 일본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자력으로 할 것’을 일렀는데, 그 스스로가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들에 의해 그렇게 죽고야 말았다. 대한제국의 통감 시절 이토는 도산 안창호를 회유하여 조선에 청년내각을 만들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그때 도산은 말했다. “만약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미국인들이 와서 했으면 가만히 있었겠느냐. 우리도 우리의 손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니 당신네 일본인들은 빠져라.” 조선의 젊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기상에 노회한 정치인 이토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말은 바로 자기 자신이 일본의 정치인으로서 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칠순을 앞에 두고 있는 이토는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기도 하다. 이토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손으로 암살을 한 경험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 중에서 유일하게 암살범 출신이다. 그리고 유신 3걸을 비롯한 일본 근대 인물들이 상당 수 암살당하거나 요절한 것에 비하면 그는 근대 일본과 함께 장수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경은 이토가 하얼빈으로 가기 전에 도쿄에서 발행되는 저팬 메일의 주필인 브링클리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에는 다소 목숨에 애착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덤으로 살고 있다.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언제고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내가 우려하는 마지막 문제는 대한제국이므로, 그 문제가 해결되면 걱정할 것이 없다.” 결국 그가 죽고 난 다음해에 한일합방이 된다. 우리 근대에 지울 수 없는 상처인 일제강점기의 전 단계까지 이토는 그 모든 일을 하다가 갔다. 그리고 우리는 불세출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만나게 된다.

이토 본인이 남긴 수기와 서한이 ‘사’이며, 이토가 누군가 나눈 대화가 ‘전’이다. <사전 이토 히로부미(이혁재 옮김, 다락원)>는 풍부한 자료와 문서를 통해 본 이토 히로부미이다. 저자 미요시 도로우는 ‘요미우리신문’ 기자 출신의 작가이다. 주로 근대의 인물을 다룬 소설과 수필, 평전 등을 집필했다. 메이지 유신의 일본을 온 몸으로 살아낸 이토, 우리에게는 한일합방의 원흉으로 전 일본인 중에서 가장 깊게 각인된 인물이다. 이 책은 이토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근대 동아시아 역사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전기라면 위인의 일생을 긍정적으로 쓰기 쉽다. 나카무라 기쿠오의 <이등박문>(중심)은 이런 전기의 경향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토의 어린 시절 성장과정이나 메이지 유신 이전의 행적 보다는 정치가로서 이토가 네 차례나 총리에 오른 배경과 과정, 개인의 정치적 역량, 정치행태 등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 정치가로서의 인격적 매력, 그가 활약한 시대의 배경, 이토의 정치적 업적과 정치력, 일할 때의 심경, 다른 정치가와의 관계 등을 중심으로 이토의 삶을 담았다. 일본인 저자의 책은 한국의 ‘애국적인 독자’들에게는 다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권의 이토 히로부미 전기를 통해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인식 수준을 한 단계 높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 우리나라의 저자들이 쓴 이토에 대한 두 편의 저서는 정일성의 <이토 히로부미>(지식산업사)와 송영걸의 <이등박문 연구>가 있다.  
 



by 니오 | 2009/03/02 11:24 | | 트랙백(6) | 덧글(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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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As time goes.. at 2009/03/02 13:30

제목 : 네이버 오늘의 인물. 이토 히로부미
그 내용이 더 문제가 있네요.글의 내용을 보면 대한민국 총감으로 있을때의 글은 "그리고 대한제국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초대 통감이 된다. 그는 1909년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이 되어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11월 4일에 치러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이게 끝?그때 먼 짓을 했는지는 없고?이건뭐 위인전에 나오는 일대기를......more

Tracked from Sprezzatura at 2009/03/02 14:26

제목 : 그다지 아닌거 같은데..
쓰레기 네이버. 순국선열을 쏘다.'싸가지'가 '메세지'다. (http://haime.egloos.com/1877380)네이버에 올라온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솔직히 난 뭐가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 그 글이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하는 것도 아니고, 안중근 의사가 잘못 죽였다는 것도 아니고.굳이 문제삼겠다면, 삼일절 다음날 올라왔다는 것 정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면, 그 아저씨 생일도 있었고, 다......more

Tracked from 뉴히스토리아 at 2009/03/02 15:17

제목 : 너무도 민감한 이야기를 맘편하게 그것도 3.1절에...
이오공감 쓰레기 네이버. 순국선열을 쏘다.에서 트랙백3.1.절에 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토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설명하는 과정에 공감못하겠군요. "너희는 메이지 유신의 이토가 아니라 조선통감 이토만 알기 때문에 너무 낮은 평가를 줘. 물론 통감 이토는 나쁘지만 대단하지 않냐?"라는 느낌인데....난데없이 입지전에 대한 동경은 좀... 어린 시절에 고생하고 온갖 수라장를 헤치고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more

Tracked from Wittyzine.co.. at 2009/03/02 15:52

제목 : 네이버, 이토 히로부미를 오늘의 세계인물로?
어제는 일제 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운 줄 모르고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을 기념하고더 깊은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제정된 3.1절이었다.뉴스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 천안 독립기념관을 찾아미디어법 때문에 난리난 국회 주요 인사들과 함께 웃으며 공연보고,박수치고, 북한과 대화를 하겠다느니의 메세지를 발표하는 게 나오고..뭐 그랬었다..그런데 오늘 아침, 자칭 / 타칭 넘버원 포털이라 할 수 있는 네이버 님께서떡~하니 첫화면......more

Tracked from haksung's me.. at 2009/03/02 18:42

제목 : 학성.의 생각
네이버 님하.. 이러니까 네이년이니 개이버니 하는 소릴 듣는거 아닙니까-ㅅ-;; 뭐 현실적인 차원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입장을 취하는가-에 대해선 그냥 넘어간다손치더라도 이건 좀 아니지 싶습니다만.....more

Tracked from 라세엄마 at 2009/03/02 20:18

제목 : 애국심은 무섭다....
쓰레기 네이버. 순국선열을 쏘다. 뭐 이토 히로부미가 괜찮은 인물이라고? 우리 대 조선 제국을 침탈한 참람된 패륜한 쓰레기 원숭이가 사실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구라를 치다니 네이버 이 저주스러운 녀석! ....뭐 세줄로 줄이면 저런 내용 되겠다. 뭐 감정적으로 이해가 안가는건 아니지만 뭔가 멀군~ 하고 생각에 빠져 있자니 잡생각이 들어서 글을 남겨본다. .... 안중근 '열사'라고 안부르면 욕이 모래시계 모래......more

Commented by JamieK at 2009/03/02 23:15

이토는 일본에서야 메이지 정부의 핵심관료로서 메이지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만들고 한 영웅(?)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인 우리로서는 '그래서 어쩌라고?' 뜬금없지요. 제 나라에서 헌법을 만들었건 말건 도대체 외국인인 우리와 무슨 상관이랍니까.;

외국인인 우리와 일본인 이토가 관계 있는 부분은 역시 이토가 고종의 서명이 빠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의 초대 통감으로서 조선 식민지화에 앞장섰다는 부분인데 이 부분 행위에 대해서 우리로선 당연히 그를 싫어할 수 밖에 없는 거고요. 이걸 가지고 '평가가 극과 극인 희대의 인물'이니 '일본에선 영웅, 한국에선 원흉'이니 낚시질을 하면 어이없는 거죠.

일부 뉴라이트는 나름대로 이토가 일본 정부 내에선 온건파였다고 이토를 찬양하는 모양인데, 답답할 뿐이죠.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면서 15개의 죄를 나열한 것을 보십시오. 식민지화가 전개되는 과정 말이죠. 주권, 국토, 지하자원, 노동력, 군대, 교육, 청년들과 여성들, 나랏말, 나라역사, 민족의 자부심.... 그 모든 것을 하나씩 빼앗겨가면서 일본의 2등 국민으로서 민족적 열등감을 내재화하는 과정이요. 이토가 '부드러운 총독 이토쨩~'이었건 말건 식민지는 식민지일 뿐이죠.

백범 김구 선생님은 그랬죠. '우리가 침략을 당해봤기에, 피해국의 고통을 알기에 우리는 침략전쟁을 반대한다. 우리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문화로서 세계 제1의 국가가 되고싶다'라고요. 아시아 각국을 식민화하며 일본제국 건설에 힘쓴 일본 정객 이토보다 백범의 사상이 더 본받을만하지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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